3.2. 일진회 관계자[편집]
3.3. 갑신정변/갑오개혁 인사[편집]
- 김윤식(?)
- 윤치호: 이쪽은 공교롭게도 애국가의 작사자로 유력시된다.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비슷한 성향의 박중양이 조선민족 자체가 답이 없다고 믿었던 반면, 윤치호는 안창호와 비슷하게 조선인은 교육을 통해서 개화가 가능하다는 쪽이며, 이순신 가문이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즉각 달려가서 이순신 사당 매입과 빚을 대신 갚아주기 위한 모금 운동을 하고 매입 되는 것을 막아서 일제에게 찍혀 불령선인의 거두로 지목된 적도 있으며, 안창호의 보석을 탄원하는 등 독립운동가와 계속 교류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조선총독부 중추원직을 지내고 제국 의회 칙선 의원이었던 등 명백한 친일파이다. 어찌보면 조선인을 걱정하면서도 일제에 맞서싸울 용기가 없는 소시민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친일파치고는 그나마 개념인으로 볼수 있는 인물.
하지만 바로 밑에 나올 이규완 앞에서는 평범한 친일파에 불과하다. - 이규완: 실제 일제강점기 때 강원도지사 등의 고위직을 지낸 것은 맞으나, 다른 친일파들과 달리 평상시 생활에서 성실하였으며 악습근절에 앞섰고 신간회, 물산장려운동 등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인 참정권 및 자치론을 주장하였고 여성들의 인권향상을 주장하던 인물이다. 친일파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 사람은 최소한 창씨개명, 병력동원, 공출, 국가에 기부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관련해서 참여한 것은 조선인 참전병사 위문품 후원회 및 원조처럼 순전히 조선인과 관련된 활동이었다. 흠이라면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고 현실성이 낮다고 본 것 뿐, 여타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비교할 수 없으며, 방식이 약간 뒤틀리긴 해도 독립운동 못지 않게 조선인을 지키려고 한 인물이다.[2] 사후에도 김구, 이승만 양쪽에서 조문단을 보내왔을 정도로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다.
3.6. 관료
[편집]
-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 박영철: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자 배정자의 셋째 남편으로, 전라북도 참여관과 함경북도 및 강원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동민회 부회장 등을 지냄.
- 박상준
- 사광욱: 일제 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패스하고 판사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 석진형
- 안용백: 이 인간은 나중에 해방 후 총선 후보로 나서면서 부정선거까지 저질렀다.
- 염창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 육사를 나옴. 일본군 장교로서 시베리아에도 출병한 바 있으나 예편하고 만주 일본영사관에서 일하며 민회 창설을 주도한 후, 이사관과 참사관 등을 역임함.
-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형제.
- 유홍순: 만주국 사무관 및 간도성 차장을 지냈고, 김동한 동상 건립도 주도함.
- 윤명선: 윤영렬의 손자로, 만주국 간도성 민생청장 역임.
- 윤치오: 윤영렬의 장남으로, 중추원 찬의 역임.
- 윤치소: 윤영렬의 차남으로, 중추원 참의 역임.
- 이경식: 충북 괴산, 진천, 옥천군수 등을 역임한 후 경학원 사성, 중추원 참의까지 지냄. 그 외에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지에서도 활동함.
- 장헌식
- 조병상: 일본명 가야마 시게루(夏山茂).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조선지원병후원회 이사 등을 지냄.
3.7. 직업형 친일인사[편집]
- 김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1921년 자유시 참변 후 1924년경에 전향해 간도협조회를 만들어 독립운동 탄압 공작을 펼침.
- 김두정: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로 1933년 조선공산당 재건투쟁협의회 사건으로 복역하여 1935년에 전향했고, 1939년 가출옥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감사 겸 서무부장을 지냄.
- 김인승 : 구한말 이전 인물. 그리고 임종국이 지목한 친일파 1호. 1876년 일본 외무성의 외국인 고문으로서 강화도 조약 체결에 도움을 준 인물이다.
- 선우순
- 이영근
- 인정식: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야학사건 주도자로 검거된 후 <삼천리> 11월호 기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전향 의사를 밝혀 <동양지광> 편집위원으로서 내선일체론 관련 글을 발표함. 대동민우회 위원 및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간사 등도 역임함.
- 박춘금: 일제강점기의 중의원 중 유일한 조선인
- 현영섭 : 일본명 아마노 미치오(天野道夫). 경성제대 출신으로 무정부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한 뒤 변절하여 녹기연맹 및 내선일체실천사 등지의 이사를 지내며 조선어 전폐론 등 온갖 친일 이론을 제창함.
3.8. 경찰[편집]
- 김극일: 신의주경찰서 경부로 이륭양행 홍성일 등 독립운동가 4명 체포. 이후 양양군수, 인제군수 등을 지냄.
- 김창영: 경찰 출신으로 금산군수를 거쳐 1937년 만주국 치안부에서 김일성의 참모 임수산 등의 귀순, 김재범 등 항일연군 수백명을 체포하는 데 기여함. 1943년 귀국 후 전라남도 산업부장 역임.
- 이성근: 대한제국 말기인 1907년 황해도 관찰도 순검과 해주경무서 순검으로 경찰 인생을 시작하여 1910년 한일합병 후 황주, 신계, 음성, 청주경찰서 경부 등을 거쳐 1920년 평안북도 경시 겸 고등경찰과장으로 부임해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치의, 보합단원 백운기, 정의부 소속 독립군 등을 체포하는 데 주도했다. 1927년 경찰직을 떠나 전라남도 내무부 산업과장, 충청남도지사, 매일신보 사장 등을 역임함.
- 유창렬: 1920년 김도원 등 보합단원 체포에 기여한 친일경찰.
- 최운하: 조선총독부 경무과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찰업무를 맡았으며 해방 뒤 서대문경찰서장, 서울시 경무국장 등을 지냄.
- 하판락: 이놈은 진주 하씨 문중에서 대놓고 숨기려다 문중 전체가 개망신을 당했다.
- 허진종(許振鍾)
3.9. 군인[편집]
- 김기원: 일본 육사 출신으로 공병 중좌를 지냄.
- 김인욱: 김석원과 일본 육사 동기로, 1932년 강계 수비대 제1중대장으로서 항일 무장대를 소탕했고, 1937년 간삼봉에서 김일성 및 최현 부대와 싸웠다.
- 김준원: 김기원의 동생이자 김정렬 전 국무총리의 부친으로, 일본 육사 졸업 후 시베리아에 출병했다가 1924년 보병 대위로 전역함. 이후 교사 및 사업가로 여생을 보냄.
- 박임항: 만주군관학교 1기 출신.
- 유승렬: 유재흥의 부친으로, 일본군 대좌로서 나남 제19사단, 관동군 등을 거쳐 태평양 전쟁 말기 뉴기니 전선에서 병으로 입원하다 1945년 패전 후 귀국했고, 1950년 6.25 전쟁 당시 부산 및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지냄.
- 윤상필: 일본 육사 출신으로 만주 침공에 참여했고, 현역 군인으로서 만주국 협화회 이사를 지냈다. 기병소좌 예편 후 협화회 중앙본부위원회 위원, 총무청 참사관 등을 지냄.
- 이병무: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주도하였고, 이에 저항한 군인 및 의병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 이희두: 구한국 장교를 일본군 장교로 전환한다는 칙령에 따라 일본 육군 소장에 임명되어 일제 조선군사령부로 배속, 정5위로 서위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기계체조단체를 조직하여 기계체조 보급.
- 정훈
- 최정근: 1943년 일본군 항공병 소위 임관 후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 때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참전하여 미 함선으로 돌격, 자폭함.
3.10. 그 외[편집]
- 권혁주: 만주국 사법국 심판관으로서 흥아청년구락부 조직에 참여했고, 팔로군을 도운 민간인들에게 사형을 때리기도 했다. 1943년 사직 후 일심회를 조직함.
- 김기수
- 김준영
- 김병제: 천도교 신파로서 시중회에 참여했고,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등지의 친일단체의 간부를 지냈다. 1945년 광복 후 월북해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냄.
- 김동진: 위 김동진과 동명이인으로,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냄.
- 김상회: 매일신보 편집국장, 경성일보 이사,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냄.
- 김억
김연수: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김성수의 동생이며 경성방직(현 경방) 2대 사장이자 삼양그룹 창업주. 중추원 참의와 만주국 명예총영사를 지낸 행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서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 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나름대로 자기 반성의 글을 썼다.- 김용제: 일본 좌파문단에서 활동하여 4년간 복역 후 조선으로 강제 송환됐고, 친일 노선으로 변절하여 <동양지광> 편집위원으로서 친일 시 등을 발표함.
- 김지태: 친일인명사전에는 없긴 한데 행적을 보면 군수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친일재벌이다.
- 김태진
- 김태흡: <불교시보> 발행인으로서 황국 정신 고취, 황도 불교, 징병제 지지 강연에 적극 나섦.
김희선: 신민회 출신으로 일경에 체포된 후 풀려나 평남군수, 개천군수 등을 지냄. 다만, 3.1 운동 직후 다시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였다.- 권영세: 경북 대구부윤과 초대 달성군수를 역임했다.
- 나웅
- 노주봉
- 민규식
- 방한준
- 서정주: 일본명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静雄). 광복 후 반공/우익 노선을 걸으며 군사독재정권을 찬양하기도 했던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 서항석
- 선우순-선우갑 형제: 형은 대동동지회장, 동생은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를 각각 지냄.
- 선우영빈: 일명 하야시. 하지만 여타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다른 행보를 걸어온 편이며, 친일파치고는 그나마 개념인 축에 속한다.
- 손석도
- 안석영
- 안인식: 조선유도회 창립 대표이자 경학원 사성, 조선유도연합회 상무이사 겸 교육부장으로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평의원 등도 맡음.
- 유광렬: 전 매일신보 편집국장.
- 윤극영(?)
- 이갑수: 군국주의 파시즘을 매개로 한 우생학의 잔재로 인해 한센병 환자 차별이 70년대까지 이어졌다. 악행 수준으로 따지자면 위의 송병준과 쌍벽을 이룬다.
- 이규서: 그야말로 위의 이갑수, 송병준과 맞먹는 악질 친일파. 이쪽은 친일 활동은 물론 자신의 삼촌 이회영을 일제에 밀고하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 이규동: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이며 만주국 사무관급 문관 출신.
- 이광수: 일본명 가야마 미츠로(香山光朗).
- 이만수: 경성고무 창업주. 일제 말 '大平晩秀'로 창씨개명 후 '조선임전보국단'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9년 군산신사 개축비 1천 원, 1940년 전북 군산향군분회 사격장 건설비 명목으로 1,700원을 각각 냈고, 1944년에는 중일전쟁 관련해 일본 육군성에 국방비 16,000원을 낸 공로로 쇼와 덴노로부터 감수포장을 받는 등 친일 행적을 벌였다. 1945년 8.15 해방 후 해당 행적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5개월 후 보석으로 풀려났다. 2012년에 군산시가 그를 포함해 임병찬, 채만식, 이영춘 등과 함께 '근대인물 5인'으로 뽑아 조각상을 만드려다 시민사회단체의 반발로 제외되었다.
- 이명세: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참사, 경학원 사성 등을 지내며 기고 및 지방 순회강연을 통해 징병제 실시와 국체명징에 대해 설파함. 또한 싱가포르 함락 및 미나미 총독 찬양 시도 지음.
- 이병도: 이 사람은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으로 근무한 것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학에 많은 기여를 한 양면이 있다.
- 이봉룡
이봉창: 일본으로 건너가 적극적으로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일본에서 갖은 차별을 받아 생각이 변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해 히로히토 덴노 암살미수 의거(義擧)를 일으켰다. 사실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냥 일반 조선인이라서 일본 측에서도 쓸 이유가 없었긴 하다.- 이상범: 화가. 호는 청전.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는 미술 담당 기자로 근무하던 1936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가담하고, 반도총후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국방헌금을 모금하기 위한 국책 기획전에 참가하여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상협: 매일신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등을 거친 언론인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관,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등을 지냄.
- 이석규: '일진회' 창설자 이용구의 아들로, 부친이 세운 시천교를 '대동일진회'로 개편하며 창씨상담실 운영, 한일병합 공로자 추도회 및 감사 위령제 등을 주도함.
- 이성재: 경성의학전문학교 중퇴자로 만주에서 무역업을 하다 <만몽일보> 창립위원으로 나섰으며, <만선일보> 출범 후 부사장 및 사장을 지냈다. 그 외에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상무위원을 지냄.
- 이원수(?)
- 이유립
- 이재호
- 이찬: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지은 걸로 알려진 월북 문인으로, 일제 때 카프 중앙위원이었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계급성이 퇴색되다 못해 1941년 이후 친일 노선을 걸은 바 있다.
- 이회광
- 이희덕: 전 일진회 간부, 간도 룽징 조선인거류민회장.
임문호: 일제 강점기 중에 천도교의 주요 인사로 활동하던 종교인인데, 태평양 전쟁 중에 변절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임종국 의 아버지 되시겠다. 취소선이 그어진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데, 아들 임종국이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알고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아버지 이름을 넣을까 하고 고심하던 차에, 임문호 본인이 직접 "내 이름도 넣어라. 거기에 내 이름이 없으면, 그건 죽은 책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이름을 수록할 것을 간곡히 요구하여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장은산: 만주군관학교 3기 출신.
- 정광조: 의암 손병희의 사위로, 1942년부터 천도교 교령이 된 후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이사장 겸 평의원을 지냄.
- 정인과: 안창호의 수행비서이자 임시의정원 부의장이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간사, 애국기헌납기성회 발기위원장 및 회장 등을 지냄.
- 조두남
- 조명암
- 조병상: 동민회 이사로서 조선농업, 한양택시 사장 등을 지내며 전조선시국강연반 감사, 경기도애국기헌납기성회 발기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등을 지냄. 1939년 경기상업학교 재학 중이던 장남 조태환을 지원병으로 입소시킨 후, 차남도 학도병 1호로 지원시킴.
- 주요한: 일본명 마츠무라 고이치(松村紘一).
- 최안국: 천도교 신파이자 부교령.
- 최재서
- 최정규: 친일 무장단체 '보민회'의 리더로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선 인물.
- 최정희
- 최창학: '금광왕'으로 불린 광산업자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배영동지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국경 경비용 화물차 3대를 평안북도 경찰부에 기부한 걸 시작으로 조선군사령부에 애국비행기 1대 및 군용기 6대 제작비 40만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10만원 등 막대한 자금을 냈으며, 그 외 정주 오산학교 등지 사회단체와 학교에도 거금을 기부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한 백범 김구에게 자택 '죽첨정'을 4년 간 빌려주기도 했다.
- 함상훈: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조광> 필진으로도 활약함.
- 허영
- 홍인화
- 홍종철[19]
- 홍택기
- 황철: 강제징용 선전영화에 계속 출연했다.
3.11. 주의할 점[편집]
주로 어르신들 사이에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은 다 친일파냐", "창씨개명한 사람은 다 친일파냐"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나온 오해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은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이기 때문.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친일 단체에 몸담은 모든 이를 친일파로 규정하진 않는다고 한다. 링크[20]
또 '귀족, 일본육군사관학교 및 만주군관학교 졸업 경력만으로도 친일파냐?'라고 하는데, 한일합방에 공은 세운자에 한해 조선귀족이 된 것이고, 자발적으로 일본군이 되기 위해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에 간 사람만 친일파인 것이다.[21] 작위를 거부하거나, 한일합방으로 인해 자동으로 일본 육사로 넘어가는 바람에 일본 육사 출신이 되었고 이후 독립군에 투신한 사람은 친일파에서 예외이다.[22]
또한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이런 점만 가지고 애먼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글을 올려서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이들에 의해 오해를 받은 대표적인 유명인사로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을 정치권에서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누구누구 아버지는 일제가 세운 은행의 은행원이었으니 친일파 자손이다라는 식인데, 애초에 저 명단에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친일적인 기관에 소속되었다 할지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명단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잠시 관제 단체에 몸담았던 김순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단지 일제하에 단순히 부역하거나 공무원 했다는 정도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 하지 않는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준은 고등문관에 해당하는 군수, 검사 이상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검사는 10명이 채 안되었다. 이렇게 기준이 너무 엄격하고도 높아서 아무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당시 2천만 인구 중에서 극 소수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 한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 좌파 성향 역사학자 한홍구도 문제 제기 과정에서 편향성이 보이며, 단순 폭로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 기사 따라서 후속 연구 과정에서 현재의 명단은 얼마든지 수정, 보완될 가능성이 있다.
진짜 비난 받아야 할 사람들은 과거 흑역사는 감추고 잘난 척을 하는 일부 높으신 분들이다. 앞서 언급한 한홍구 교수도 당시 언론의 친일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민족정론지라는 자랑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함부로 집안 자랑을 하는 후손들 때문에 저런 사실이 까발려지는 경우도 있다.
일제 시기 근무했던 말단 공무원들조차도 일제에 협력한 과거사를 뉘우치기도 하는데, 1986년에 정년퇴임한 김남식 교사(1919~2010)는 일제 시기 제자들에게 일본어만 가르치도록 강요하는 등 민족으로서 씻지 못할 죄를 참회하고자 1968년부터 2010년 작고 때까지 서울 경희대 앞에서 청소를 해왔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친일 단체에 몸담은 모든 이를 친일파로 규정하진 않는다고 한다. 링크[20]
또 '귀족, 일본육군사관학교 및 만주군관학교 졸업 경력만으로도 친일파냐?'라고 하는데, 한일합방에 공은 세운자에 한해 조선귀족이 된 것이고, 자발적으로 일본군이 되기 위해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에 간 사람만 친일파인 것이다.[21] 작위를 거부하거나, 한일합방으로 인해 자동으로 일본 육사로 넘어가는 바람에 일본 육사 출신이 되었고 이후 독립군에 투신한 사람은 친일파에서 예외이다.[22]
또한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이런 점만 가지고 애먼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글을 올려서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이들에 의해 오해를 받은 대표적인 유명인사로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을 정치권에서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누구누구 아버지는 일제가 세운 은행의 은행원이었으니 친일파 자손이다라는 식인데, 애초에 저 명단에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친일적인 기관에 소속되었다 할지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명단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잠시 관제 단체에 몸담았던 김순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단지 일제하에 단순히 부역하거나 공무원 했다는 정도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 하지 않는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준은 고등문관에 해당하는 군수, 검사 이상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검사는 10명이 채 안되었다. 이렇게 기준이 너무 엄격하고도 높아서 아무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당시 2천만 인구 중에서 극 소수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 한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 좌파 성향 역사학자 한홍구도 문제 제기 과정에서 편향성이 보이며, 단순 폭로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 기사 따라서 후속 연구 과정에서 현재의 명단은 얼마든지 수정, 보완될 가능성이 있다.
진짜 비난 받아야 할 사람들은 과거 흑역사는 감추고 잘난 척을 하는 일부 높으신 분들이다. 앞서 언급한 한홍구 교수도 당시 언론의 친일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민족정론지라는 자랑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함부로 집안 자랑을 하는 후손들 때문에 저런 사실이 까발려지는 경우도 있다.
일제 시기 근무했던 말단 공무원들조차도 일제에 협력한 과거사를 뉘우치기도 하는데, 1986년에 정년퇴임한 김남식 교사(1919~2010)는 일제 시기 제자들에게 일본어만 가르치도록 강요하는 등 민족으로서 씻지 못할 죄를 참회하고자 1968년부터 2010년 작고 때까지 서울 경희대 앞에서 청소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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