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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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일진회 관계자[편집]

3.3. 갑신정변/갑오개혁 인사[편집]

  • 윤치호: 이쪽은 공교롭게도 애국가의 작사자로 유력시된다.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비슷한 성향의 박중양이 조선민족 자체가 답이 없다고 믿었던 반면, 윤치호는 안창호와 비슷하게 조선인은 교육을 통해서 개화가 가능하다는 쪽이며, 이순신 가문이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즉각 달려가서 이순신 사당 매입과 빚을 대신 갚아주기 위한 모금 운동을 하고 매입 되는 것을 막아서 일제에게 찍혀 불령선인의 거두로 지목된 적도 있으며, 안창호의 보석을 탄원하는 등 독립운동가와 계속 교류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조선총독부 중추원직을 지내고 제국 의회 칙선 의원이었던 등 명백한 친일파이다. 어찌보면 조선인을 걱정하면서도 일제에 맞서싸울 용기가 없는 소시민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친일파치고는 그나마 개념인으로 볼수 있는 인물. 하지만 바로 밑에 나올 이규완 앞에서는 평범한 친일파에 불과하다.
  • 이규완: 실제 일제강점기 때 강원도지사 등의 고위직을 지낸 것은 맞으나, 다른 친일파들과 달리 평상시 생활에서 성실하였으며 악습근절에 앞섰고 신간회물산장려운동 등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인 참정권 및 자치론을 주장하였고 여성들의 인권향상을 주장하던 인물이다. 친일파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 사람은 최소한 창씨개명, 병력동원, 공출, 국가에 기부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관련해서 참여한 것은 조선인 참전병사 위문품 후원회 및 원조처럼 순전히 조선인과 관련된 활동이었다. 흠이라면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고 현실성이 낮다고 본 것 뿐, 여타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비교할 수 없으며, 방식이 약간 뒤틀리긴 해도 독립운동 못지 않게 조선인을 지키려고 한 인물이다.[2] 사후에도 김구이승만 양쪽에서 조문단을 보내왔을 정도로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다.

3.6.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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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 박영철: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자 배정자의 셋째 남편으로, 전라북도 참여관과 함경북도 및 강원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동민회 부회장 등을 지냄.
  • 박중양 : 여타 친일파들과는 달리, 신념 자체가 친일이었던 사람이다. 해방 이후 이광수나 여러 친일파들이 자신의 친일행적을 부정하거나 사과하고 있었을 때, "나는 떳떳하고, 조선은 망해야 할 나라였다"고 주장하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친일파보다는 구한말 행태 내지 추태에 환멸을 느끼고 아예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사람에 가깝다. 이 주장을 했을 시기에 개화파의 가족들이 연좌제로 무고하게 처형당한것에 충격받고 절망하였다. 그가 끼친 악행들이 비판 받아 마땅한것과 별개로 계기만큼은 (그의 입장에서) 이해여지가 있는 편이다.
  • 박상준
  • 사광욱: 일제 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패스하고 판사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 석진형
  • 안용백: 이 인간은 나중에 해방 후 총선 후보로 나서면서 부정선거까지 저질렀다.
  • 염창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 육사를 나옴. 일본군 장교로서 시베리아에도 출병한 바 있으나 예편하고 만주 일본영사관에서 일하며 민회 창설을 주도한 후, 이사관과 참사관 등을 역임함.
  •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형제.
  • 유홍순: 만주국 사무관 및 간도성 차장을 지냈고, 김동한 동상 건립도 주도함.
  • 윤명선: 윤영렬의 손자로, 만주국 간도성 민생청장 역임.
  • 윤치오: 윤영렬의 장남으로, 중추원 찬의 역임.
  • 윤치소: 윤영렬의 차남으로, 중추원 참의 역임.
  • 이경식: 충북 괴산, 진천, 옥천군수 등을 역임한 후 경학원 사성, 중추원 참의까지 지냄. 그 외에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지에서도 활동함.
  • 장헌식
  • 조병상: 일본명 가야마 시게루(夏山茂).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조선지원병후원회 이사 등을 지냄.

3.7. 직업형 친일인사[편집]

  • 김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1921년 자유시 참변 후 1924년경에 전향해 간도협조회를 만들어 독립운동 탄압 공작을 펼침.
  • 김두정: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로 1933년 조선공산당 재건투쟁협의회 사건으로 복역하여 1935년에 전향했고, 1939년 가출옥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감사 겸 서무부장을 지냄.
  • 김인승 : 구한말 이전 인물. 그리고 임종국이 지목한 친일파 1호. 1876년 일본 외무성의 외국인 고문으로서 강화도 조약 체결에 도움을 준 인물이다.
  • 선우순
  • 이영근
  • 인정식: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야학사건 주도자로 검거된 후 <삼천리> 11월호 기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전향 의사를 밝혀 <동양지광> 편집위원으로서 내선일체론 관련 글을 발표함. 대동민우회 위원 및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간사 등도 역임함.
  • 박춘금: 일제강점기의 중의원 중 유일한 조선인
  • 현영섭 : 일본명 아마노 미치오(天野道夫). 경성제대 출신으로 무정부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한 뒤 변절하여 녹기연맹 및 내선일체실천사 등지의 이사를 지내며 조선어 전폐론 등 온갖 친일 이론을 제창함.
  • 차재정: 서울청년회, 신간회 등지에서 일하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투쟁 확산에 주력하다 2년을 복역했고, 비밀결사 혐의로 잡혀갔다가 무혐의로 방면된 후 전향함. 1936년에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비난하는 견해를 폈다.

3.8. 경찰[편집]

  • 김극일: 신의주경찰서 경부로 이륭양행 홍성일 등 독립운동가 4명 체포. 이후 양양군수, 인제군수 등을 지냄.
  • 김덕기반민특위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악질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설이 있으나, 독립투사 정이형 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전에 정릉 근처의 산에 갔다가 추락사했다 한다.
  • 김창영: 경찰 출신으로 금산군수를 거쳐 1937년 만주국 치안부에서 김일성의 참모 임수산 등의 귀순, 김재범 등 항일연군 수백명을 체포하는 데 기여함. 1943년 귀국 후 전라남도 산업부장 역임.
  • 김태석강우규 열사를 고문했다고 알려진 친일 경찰
  • 노덕술: 일본명 마츠우라 히로(松浦鴻).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고문경찰이었다. 해방 후에도 독립운동가를 치욕스럽게 해서 김원봉이 월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원봉이 침략자로 타락하기 전이었으니 훗날 6.25까지 고려하면 무고한 사람을 악마로 만든것이나 다름 없다.
  • 이성근: 대한제국 말기인 1907년 황해도 관찰도 순검과 해주경무서 순검으로 경찰 인생을 시작하여 1910년 한일합병 후 황주, 신계, 음성, 청주경찰서 경부 등을 거쳐 1920년 평안북도 경시 겸 고등경찰과장으로 부임해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치의, 보합단원 백운기, 정의부 소속 독립군 등을 체포하는 데 주도했다. 1927년 경찰직을 떠나 전라남도 내무부 산업과장, 충청남도지사, 매일신보 사장 등을 역임함.
  • 유창렬: 1920년 김도원 등 보합단원 체포에 기여한 친일경찰.
  • 최연: 1938년 혜산 사건을 수사하며 박달 등 3백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해 악명을 떨친 친일 경찰. 해방 뒤 경기도 경찰부 경무과장을 지냈다.
  • 최운하조선총독부 경무과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찰업무를 맡았으며 해방 뒤 서대문경찰서장, 서울시 경무국장 등을 지냄.
  • 최태민일명 조선의 그리고리 라스푸틴. 일제강점기 황해도 지역에서 순사로 근무,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던 친일매국노였고 해방 이후엔 사이비 종교 영세교 교주 및 사기꾼으로서 정치, 사회, 종교계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망친 온갖 적폐의 만악의 근원 1호.[3]
  • 하판락: 이놈은 진주 하씨 문중에서 대놓고 숨기려다 문중 전체가 개망신을 당했다.
  • 허진종(許振鍾)

3.9. 군인[편집]

  • 김기원: 일본 육사 출신으로 공병 중좌를 지냄.
  • 김백일흥남철수 항목 참조. 만주군 출신이라 민문연이나 시민단체의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 김석원일본군 출신으로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고, 학병권유를 다닌 적이 있다. 그러나 성남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서전에 "일제식민지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독립군 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의 가족을 돌봐준 걸 보면 어느 정도 양심은 있던 사람이다. 물론 이규완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뿐이다.
  • 김인욱: 김석원과 일본 육사 동기로, 1932년 강계 수비대 제1중대장으로서 항일 무장대를 소탕했고, 1937년 간삼봉에서 김일성 및 최현 부대와 싸웠다.
  • 김종원 : 이쪽은 친일파 이전에 인간인지부터 의심해야 될 수준으로 인육을 먹는것을 즐겼으며, 해방 후에는 대놓고 학살을 저질렀다.
  • 김준원: 김기원의 동생이자 김정렬 전 국무총리의 부친으로, 일본 육사 졸업 후 시베리아에 출병했다가 1924년 보병 대위로 전역함. 이후 교사 및 사업가로 여생을 보냄.
  • 박정희: 일본명 타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만주군관학교 2기 및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편입) 출신, 만주군 장교(최종계급 중위) 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4]
  • 박임항: 만주군관학교 1기 출신.
  • 백선엽: 일본명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5] 간도특설대 중위. 간도특설대(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부대) 3기로 있었다. 광복 이후에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공로가 있는데다 이후 대한민국에 노고한 공로를 감안해 일반적인 친일파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할 여지는 있지만, 일생 전체에 대한 평가는 극명히 갈리는 인물이다. 일단 일제강점기 친일 경력 자체만 보면 논란의 여지가 없다.
  • 유승렬: 유재흥의 부친으로, 일본군 대좌로서 나남 제19사단, 관동군 등을 거쳐 태평양 전쟁 말기 뉴기니 전선에서 병으로 입원하다 1945년 패전 후 귀국했고, 1950년 6.25 전쟁 당시 부산 및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지냄.
  • 윤상필: 일본 육사 출신으로 만주 침공에 참여했고, 현역 군인으로서 만주국 협화회 이사를 지냈다. 기병소좌 예편 후 협화회 중앙본부위원회 위원, 총무청 참사관 등을 지냄.
  • 이병무: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주도하였고, 이에 저항한 군인 및 의병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 이희두: 구한국 장교를 일본군 장교로 전환한다는 칙령에 따라 일본 육군 소장에 임명되어 일제 조선군사령부로 배속, 정5위로 서위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기계체조단체를 조직하여 기계체조 보급.
  • 정훈
  • 최정근: 1943년 일본군 항공병 소위 임관 후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 때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참전하여 미 함선으로 돌격, 자폭함.
  • 최창식 : 명백함 친일파임에도 6.25 전쟁때 억울함으로 인해 친일파 중에서는 드물게 후손들에게 까이지 않는 편이다. [6]
  • 홍사익 - 일본 육군 중장. 그가 골수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그가 한 발언에서 알 수 있는데,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8월 10일 그의 부관이 조국 조선의 독립을 축하한다고 했으나, 그는 "이 제복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고 답했다. 결국 그는 1946년 필리핀에서 포로 학대 혐의로 전범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3.10. 그 외[편집]

  • 권상로: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한일합방에 찬성한 불교 승려로, 법명은 퇴경이다. 조선총독부의 친불교 행적을 찬양하며[7] 2차대전에서 일본을 위해 승리하는 것이 곧 성불하는 것이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며 <임전의 조선불교>등을 저술했다. 해방 이후엔 불교계 미션스쿨인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에 임명되었다. 김활란보다 악질이다.[8]
  • 권혁주: 만주국 사법국 심판관으로서 흥아청년구락부 조직에 참여했고, 팔로군을 도운 민간인들에게 사형을 때리기도 했다. 1943년 사직 후 일심회를 조직함.
  • 김경천(金敬天)[9]: 대장인 전봉준을 팔아넘긴 배신자.
  • 김기수
  • 김준영
  • 김병제: 천도교 신파로서 시중회에 참여했고,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등지의 친일단체의 간부를 지냈다. 1945년 광복 후 월북해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냄.
  • 김기창: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의 그림 여러 작품을 그림. 다만 말년에는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
  • 김길창: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광복 이후 까지 대한민국의 장로회 교단을 주도했던 인물이었으나 일제강점기때 장로회의 신사참배를 주도하여 대한민국의 장로회에 크나큰 오점을 남겼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대한민국 장로회 교단의 분열에 결정타를 날리게 되었다. 부산 대표 개신교 사학재단이자 부산 최대 사학재단인 학교법인 남성/국성/한성/훈성학원의 설립자로도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백선엽의 개신교 버전으로 볼수 있다. [10]
  • 김동진: 위 김동진과 동명이인으로,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냄.
  • 김상회: 매일신보 편집국장, 경성일보 이사,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냄.
  • 김성수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후 보전을 고려대학교로 승격시키고 고려중앙학원을 설립. 일제 말기에 전시체제 홍보 및 학도병 지원을 적극적으로 독려한 흑역사가 있다.
  • 김순흥: 배우 이지아의 조부. 참고로 이지아의 사촌동생이 김순흥의 친일 행적을 부인했다가, 빈축을 산 바 있으며, 덩달아 이지아의 이미지까지 하락했다.
  • 김억
  • 김연수: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김성수의 동생이며 경성방직(현 경방) 2대 사장이자 삼양그룹 창업주. 중추원 참의와 만주국 명예총영사를 지낸 행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서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 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나름대로 자기 반성의 글을 썼다.
  • 김용제: 일본 좌파문단에서 활동하여 4년간 복역 후 조선으로 강제 송환됐고, 친일 노선으로 변절하여 <동양지광> 편집위원으로서 친일 시 등을 발표함.
  • 김용주: 일본명 카네다 류슈(金田龍周). 섬유업체 (주)전방의 창업주이며 김무성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
  • 김은호: 호는 이당으로 표준영정 제작 참여자이자 세조 어진 화가로도 유명하나, '금차봉납도'라는 친일 그림으로 흑역사를 만들었다.
  • 김인승, 경승 형제: 형인 인승은 서양화가이자 이화여대 미대 학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동생인 경승은 조각가이자 국전 심사위원, 예술회 회원 등을 지내며 백범 김구, 충무공 이순신, 도산 안창호, 안중근 의사 등의 동상을 만들어낸 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제 시기에 전쟁 협력 작품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올려 선전 연속 4회 특전, 총독상 등을 수상하며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로 활동하여 전람회에서 나온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친 흑역사가 있었다.
  • 김지태: 친일인명사전에는 없긴 한데 행적을 보면 군수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친일재벌이다.
  • 김태진
  • 김태흡: <불교시보> 발행인으로서 황국 정신 고취, 황도 불교, 징병제 지지 강연에 적극 나섦.
  • 김활란: 일본명 아마기 가츠란(天城活蘭).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 이화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다.[11] 이화학당 고등과와 대학과를 졸업한 후 모교 교장이 되었다. 교육과 기독교 선교에 힘썼다고 하나, 자국 여자들을 위안부정신대에 팔아먹은 자로 절대로 사람이 아니며, 교육가로서는 완전히 타락한 인물이다. 유관순 열사가 존경했던 선배였다고 한다.[12]
  • 김희선: 신민회 출신으로 일경에 체포된 후 풀려나 평남군수, 개천군수 등을 지냄. 다만, 3.1 운동 직후 다시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였다.
  • 권영세: 경북 대구부윤과 초대 달성군수를 역임했다.
  • 나웅
  •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한국 가톨릭계의 대부인 성직자인데, 이 사람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일단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건 맞으나, 이를 두고 교황청의 결정에 순응한 결과라는 지적이 많기 때문이다.[13]
  • 노수현: 호는 심산(心汕)으로 조선일보에서 한국 최초의 신문연재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여 유명세를 타다가 해방 뒤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창시하고 제자를 수도 없이 양성하여 한국 동양화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손꼽히나, 친일 계열 잡지인 <신시대> 1941년 1월호에 멍텅구리 캐릭터들을 등장시킨 만화를 발표하여 일제의 침략 전쟁에 지원할 것을 역설했다는 이유로 2008년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 노주봉
  • 문명기: 일본명 후미아키 기이치로(文明琦一郞). 별칭 헌납병 환자야만기라고도 불린다. 이 자는 경상북도 영덕군을 기점으로 제지업에서 시작해 금광 인수로 돈을 왕창 벌어서 1936년에 친일 기업인 중에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일제에 헌납한 것을 시작으로 1943년까지 육/해군에 각각 2만 원, 4만 원을 기부한 뒤 마침내 자신의 구리광산 2개를 기부하는 등 헌납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종손 문태준은 교수, 의원, 보사부 장관 등을 지낸 바 있다.
  • 민규식
  • 민영기을사조약 체결 당시 탁지부 대신(지금의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을 때 을사오적과는 달리 조약체결에 반대했으나 후에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와 이왕직장관을 지냈다.
  • 방한준
  • 서정주: 일본명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静雄). 광복 후 반공/우익 노선을 걸으며 군사독재정권을 찬양하기도 했던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 서항석
  • 선우순-선우갑 형제: 형은 대동동지회장, 동생은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를 각각 지냄.
  • 선우영빈: 일명 하야시. 하지만 여타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다른 행보를 걸어온 편이며, 친일파치고는 그나마 개념인 축에 속한다.
  • 손석도
  • 신상묵: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 소속 前국회의원 신기남 아버지.
  • 심영: 일본명 아오키 진에이(青木沈影). 우리가 아는 그 고자 심영이다. 문예봉과 같이 친일반민족+친북을 한다. [14]
  • 안석영
  • 안용백경남고등학교 초대 교장. 교내 캠퍼스 안에 흉상을 설치하였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이유로 없애라는 의견이 오간다.
  • 안익태: 일본명 에키타이 안. 애국가 작곡한 그 안익태 맞다! 애국가를 작곡한 양반이 왜 저런 짓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 안인식: 조선유도회 창립 대표이자 경학원 사성, 조선유도연합회 상무이사 겸 교육부장으로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평의원 등도 맡음.
  • 안준생: 이 사람은 안중근의 아들로,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을 한 분이지만, 정작 그의 아들은 일본 제국의 개 노릇을 한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다...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것도 주류 학계에서!
  • 여운홍독립운동가 여운형의 동생 원래는 형처럼 독립운동가였지만 일제강점기 후반에 절망하며 전향했다.
  • 유광렬: 전 매일신보 편집국장.
  • 유명한: 일본명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 유일한 박사의 동생이자 유유그룹 창업주인 유특한 선생의 형. 형과 동생과는 달리, 골수 극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집안을 엿먹였다.[15] 게다가 액수로만 따져도 김순흥은 그대로 쌈싸먹는다.[16]
  • 유치환(?): 명백히 친일파임이 밝혀진 형 유치진과는 달리, 청마의 친일 행적을 두고 그를 본격적인 친일파로 볼 수 있느냐는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일단은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고 단순히 부일파로만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래도 당시에 청마가 현실 순응적인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다.
  • 이갑수: 군국주의 파시즘을 매개로 한 우생학의 잔재로 인해 한센병 환자 차별이 70년대까지 이어졌다. 악행 수준으로 따지자면 위의 송병준과 쌍벽을 이룬다.
  • 이규서: 그야말로 위의 이갑수, 송병준과 맞먹는 악질 친일파. 이쪽은 친일 활동은 물론 자신의 삼촌 이회영을 일제에 밀고하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 이규동: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이며 만주국 사무관급 문관 출신.
  • 이광수: 일본명 가야마 미츠로(香山光朗).
  • 이만수: 경성고무 창업주. 일제 말 '大平晩秀'로 창씨개명 후 '조선임전보국단'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9년 군산신사 개축비 1천 원, 1940년 전북 군산향군분회 사격장 건설비 명목으로 1,700원을 각각 냈고, 1944년에는 중일전쟁 관련해 일본 육군성에 국방비 16,000원을 낸 공로로 쇼와 덴노로부터 감수포장을 받는 등 친일 행적을 벌였다. 1945년 8.15 해방 후 해당 행적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5개월 후 보석으로 풀려났다. 2012년에 군산시가 그를 포함해 임병찬, 채만식, 이영춘 등과 함께 '근대인물 5인'으로 뽑아 조각상을 만드려다 시민사회단체의 반발로 제외되었다.
  • 이명세: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참사, 경학원 사성 등을 지내며 기고 및 지방 순회강연을 통해 징병제 실시와 국체명징에 대해 설파함. 또한 싱가포르 함락 및 미나미 총독 찬양 시도 지음.
  • 이병도: 이 사람은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으로 근무한 것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학에 많은 기여를 한 양면이 있다.
  • 이봉룡
  • 이봉창: 일본으로 건너가 적극적으로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일본에서 갖은 차별을 받아 생각이 변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해 히로히토 덴노 암살미수 의거(義擧)를 일으켰다. 사실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냥 일반 조선인이라서 일본 측에서도 쓸 이유가 없었긴 하다.
  • 이상범화가. 호는 청전.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는 미술 담당 기자로 근무하던 1936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가담하고, 반도총후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국방헌금을 모금하기 위한 국책 기획전에 참가하여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상협: 매일신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등을 거친 언론인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관,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등을 지냄.
  • 이석규: '일진회' 창설자 이용구의 아들로, 부친이 세운 시천교를 '대동일진회'로 개편하며 창씨상담실 운영, 한일병합 공로자 추도회 및 감사 위령제 등을 주도함.
  • 이성재: 경성의학전문학교 중퇴자로 만주에서 무역업을 하다 <만몽일보> 창립위원으로 나섰으며, <만선일보> 출범 후 부사장 및 사장을 지냈다. 그 외에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상무위원을 지냄.
  • 이유립
  • 이재호
  • 이종찬일제강점기 중에는 분명히 친일파가 맞았으나, 해방 후에 크게 회개하고 독립 대한민국을 수호하고자 6.25 전쟁에서 열심히 싸웠고,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군의 정치개입을 막으려 했다. 심지어 친일파 시절에도 대인배스런 인품의 소유자이자, 부하를 사랑하고 민간인을 존중하는 덕장으로 칭송이 자자했기 때문에, 이 점에서 친일파로서의 이종찬은 위의 김석원이나 이규완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17]
  • 이윤용이완용의 형으로 형제가 전부 매국노가 되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 이찬: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지은 걸로 알려진 월북 문인으로, 일제 때 카프 중앙위원이었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계급성이 퇴색되다 못해 1941년 이후 친일 노선을 걸은 바 있다.
  • 이회광
  • 이효석: 이 사람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사연이 정말 애절하다. 생활고로 아내와 차남이 병을 앓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더 안타까운 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지 얼마 안 가서 두 사람은 병사하고 만다는 거다. 이 일과 더불어 자신의 변절을 비웃는 발언에 부끄러움을 느껴서 친일파 노릇을 때려 치운 일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후손들(일찍 사망한 차남의 후손을 제외한)마저도 이렇게 살고 있다.
  • 이희덕: 전 일진회 간부, 간도 룽징 조선인거류민회장.
  • 임문호일제 강점기 중에 천도교의 주요 인사로 활동하던 종교인인데, 태평양 전쟁 중에 변절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임종국 의 아버지 되시겠다. 취소선이 그어진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데, 아들 임종국이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알고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아버지 이름을 넣을까 하고 고심하던 차에, 임문호 본인이 직접 "내 이름도 넣어라. 거기에 내 이름이 없으면, 그건 죽은 책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이름을 수록할 것을 간곡히 요구하여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 장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긴 했지만 그의 제자였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장면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은 정치가 김대중 등이 반발한 바 있다. 요즘도 무리한 선정이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장우성(?): 호는 월전으로 이순신유관순 등의 표준영정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나, 1943년에 조선총독부의 주최로 열린 '조선미술전람회 창덕궁상 수상 시상식'에 '부동명왕상' 모델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18]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참고.
  • 장은산: 만주군관학교 3기 출신.
  • 정광조: 의암 손병희의 사위로, 1942년부터 천도교 교령이 된 후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이사장 겸 평의원을 지냄.
  • 정인과: 안창호의 수행비서이자 임시의정원 부의장이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간사, 애국기헌납기성회 발기위원장 및 회장 등을 지냄.
  • 정춘수개신교(감리회먹사. 1919년에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으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구속되고 전향하여 친일 활동에 나서며 비행기 헌납, 교회 종이나 대문 헌납신사참배 등을 촉구했다.
  • 조두남
  • 조명암
  • 조병상: 동민회 이사로서 조선농업, 한양택시 사장 등을 지내며 전조선시국강연반 감사, 경기도애국기헌납기성회 발기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등을 지냄. 1939년 경기상업학교 재학 중이던 장남 조태환을 지원병으로 입소시킨 후, 차남도 학도병 1호로 지원시킴.
  • 주요한: 일본명 마츠무라 고이치(松村紘一).
  • 최안국: 천도교 신파이자 부교령.
  • 최재서
  • 최정규: 친일 무장단체 '보민회'의 리더로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선 인물.
  • 최정희
  • 최창학: '금광왕'으로 불린 광산업자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배영동지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국경 경비용 화물차 3대를 평안북도 경찰부에 기부한 걸 시작으로 조선군사령부에 애국비행기 1대 및 군용기 6대 제작비 40만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10만원 등 막대한 자금을 냈으며, 그 외 정주 오산학교 등지 사회단체와 학교에도 거금을 기부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한 백범 김구에게 자택 '죽첨정'을 4년 간 빌려주기도 했다.
  • 함상훈: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조광> 필진으로도 활약함.
  • 허영
  • 홍인화
  • 홍종철[19]
  • 홍진기: 일본명 도쿠야마 신이치(徳山進一). 법조인이자 중앙일보 2대 사장 및 초대 회장. 이건희 부인 홍라희의 아버지.
  • 홍택기
  • 황철: 강제징용 선전영화에 계속 출연했다.

참고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초기의 기준은 장교뿐만 아니라 관공서의 말단 공무원까지 포함되었다. 너무 광범위하다는 이유로 축소되었고, 한민당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면 공포와 불안을 조성할 것"이라는 핑계로 계속 축소하였고, 결국 관련법안을 1951년에 폐지시켰다.

3.11. 주의할 점[편집]

주로 어르신들 사이에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은 다 친일파냐""창씨개명한 사람은 다 친일파냐"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나온 오해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은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이기 때문.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친일 단체에 몸담은 모든 이를 친일파로 규정하진 않는다고 한다. 링크[20]

또 '귀족일본육군사관학교 및 만주군관학교 졸업 경력만으로도 친일파냐?'라고 하는데, 한일합방에 공은 세운자에 한해 조선귀족이 된 것이고, 자발적으로 일본군이 되기 위해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에 간 사람만 친일파인 것이다.[21] 작위를 거부하거나, 한일합방으로 인해 자동으로 일본 육사로 넘어가는 바람에 일본 육사 출신이 되었고 이후 독립군에 투신한 사람은 친일파에서 예외이다.[22]

또한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이런 점만 가지고 애먼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글을 올려서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이들에 의해 오해를 받은 대표적인 유명인사로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을 정치권에서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누구누구 아버지는 일제가 세운 은행의 은행원이었으니 친일파 자손이다라는 식인데, 애초에 저 명단에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친일적인 기관에 소속되었다 할지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명단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잠시 관제 단체에 몸담았던 김순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단지 일제하에 단순히 부역하거나 공무원 했다는 정도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 하지 않는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준은 고등문관에 해당하는 군수, 검사 이상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검사는 10명이 채 안되었다. 이렇게 기준이 너무 엄격하고도 높아서 아무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당시 2천만 인구 중에서 극 소수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 한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 좌파 성향 역사학자 한홍구도 문제 제기 과정에서 편향성이 보이며, 단순 폭로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 기사 따라서 후속 연구 과정에서 현재의 명단은 얼마든지 수정, 보완될 가능성이 있다.

진짜 비난 받아야 할 사람들은 과거 흑역사는 감추고 잘난 척을 하는 일부 높으신 분들이다. 앞서 언급한 한홍구 교수도 당시 언론의 친일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민족정론지라는 자랑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함부로 집안 자랑을 하는 후손들 때문에 저런 사실이 까발려지는 경우도 있다.

일제 시기 근무했던 말단 공무원들조차도 일제에 협력한 과거사를 뉘우치기도 하는데, 1986년에 정년퇴임한 김남식 교사(1919~2010)는 일제 시기 제자들에게 일본어만 가르치도록 강요하는 등 민족으로서 씻지 못할 죄를 참회하고자 1968년부터 2010년 작고 때까지 서울 경희대 앞에서 청소를 해왔다.

3.12. 잘못 알려진 사례[편집]

지금은 잊힌 황당한 루머 중에 싸이와 보아가 을사오적의 후예라는 루머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 기사로도 언급되었는데 그 근거라는 게 성이 박씨권씨라는 것이어서 당연히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보아의 경우에는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인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는 루머성 기사도 존재했다. 하지만 아래 나온 명단은 정말로 진지하게 논란이 되었던 사례이다. 당사자로서는 정말 억울할 일.
  • 김수환 - 신학생 시절 학도병으로 강제징집 당했다.[23]
  • 이난영 - 일제강점기에 친일 가요를 부른 행적이 알려져 논란이 되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이 없다는 이유로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기사
  • 현승종 - 역사학자 한홍구가 해명해 주었지만, 결국 건국대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애초에 논란이 된 계기가 외부의 문제 제기가 아니라 본인의 참회 고백이었다는 것이다. 즉, 고백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이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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